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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 TV가 진짜 무서운 이유

by 슬몃 2020. 3. 21.

요즘 아들이 티비를 보는 모습을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5세(만3세)의 아들은 쉬는 날이면 더욱 티비를 보여 달라고 한다. 난 이 녀석을 키우면서 내가 바랬던 티비 없는 삶을 이뤘다. 내 자식에게는 나의 이런 고민(고생)을 하지 않을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 다짐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티비를 보는 아들의 뒷모습에서 나의 어린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되도록 보면 안된다. 특히 길게 보면 안 된다.

 

티비를 보면 외롭고 심심할 시간이 살아진다. 외롭고 심심한 시간은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이런 고요함 속에서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안의 나와 대화를 하게 된다. 어떤 것을 할 궁리를 하게 된다.

 

재미로 봤다.

나도 처음에 재미로 봤다. 재미있는게 너무 많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예능. 이제는 유투브에 넷플릭스, 디즈니+, 왓챠. 정말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내가 사소하게 궁금해 했던 것들. 정말 보고 싶었던 이야기들. 슬쩍 봤더니 호기심이 가는 것들. 세상엔 정말 재미 있는 영상들이 많이 있다. 꼬리에 꼬리는 무는 호기심으로 많은 시간들이 채워진다. 이런 콘텐츠들을 보면 많은 감정적 동요로 풍족한 하루로 느껴지기도 했다.

심심 (and 지루) 해서 봤다.

지루해서 멍하니 시간 때우려고 봤던 것 같다. 능동적으로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을 때, 수동적으로 편하니 보내고 싶을 때. 사실 이럴 땐, 휴식에 의미를 많이 부여했었다. 멍하니 티비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잘가닌깐. 휴식이닌깐 그래도 된다 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휴식으로 하루를 보내면 머릿속의 저림이나 진동이 느껴지면서 멍해진다. 잘 쉬었나? 고민스러워진다.

적막해서 봤다.

집에 들어오면 아무도 없는 집은 많이 적막했다. 클럽이나 노래방에서, 혹은 헤드폰으로 음악을 크게 오랜 시간 듣다가 헤드폰을 벗으면 세상 조용하고 적막한 느낌처럼 어색함이 흐른다. 이런 적막이 싫어 배경 소음을 티비로 만든다. 티비라는 덧을 스스로 설치해두고 그 길목을 어슬렁 거리며 그 덧을 밟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빠른 시간에 그 덧을 밟고 만다.

나도 모르게 봤다.

보다 보면 약간의 피곤함과 정신이 살짝 멍해지는 때가 있었다. 이때쯤이면 이미 내가 보려고 했던 프로그램은 끝나가거나 끝났다. 심지어 이미 내가 보려고 했던 프로는 이미 끝났고, 다음 프로까지 끝난 상태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티비를 끄면 정적이 흐른다. 이 정적이 너무 싫어서 배경음악으로 티비를 계속 켜두게 된다. 티비를 보며 그간 쌓였던 피로도 풀고 화장실도 다녀온다. 정신과 몸의 환기기 될 때 쯤, 티비에선 그럭저럭 괜찮은 (혹은 무척이나 좋아하는) 프로가 한다. 한번 쯤은 궁금 했었거나, 한번쯤 재미있게 봤던 그런 티비 프로그램들 말이다. 지금 당장 꼭 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너무나도 적절한 프로가 나온다. 거절 하기는 힘들다. 난 지금 당장 딱히 할 일도 없다. 그에 비해 이 프로그램은 딱히 나쁘지도 않다. 이렇게 1~2시간 잡혀서 보낸다.

티비로 채워진 하루가 된다.

그렇게 하루가 간다. 재미있던 장면들이 기억에 나기도 하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어느 날은 영화로 채워진 하루, 어느 날은 다큐멘터리로 채워진 하루. 어느 날은 드라마로 채워진 하루가 된다.

원해서 보기 시작했든, 우연히 보게 되었든 대부분은 내가 원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원해서 보기 시작 했든, 우연히 보게 되었든 대부분은 내가 원했던 것 보다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

TV, OTT 모두 무섭다.

두 플렛폼은 다른 특징으로 무섭다. 티비(공중파와 케이블)는 랜덤한 플레이 리스트에서 오는 우연성 중독이 무섭다. OTT 는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진다. 호기심 중독이 무섭다.

하지만 막상 그 우연성과 호기심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가볍고 단순하게 '그냥 한번 가볍게 어떤 프로그램이 하나 보기만 하자.', '그래서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 하나 보기만 하자.' 이 정도의 가볍움으로 시작된다.

 

이로서 나를 돌아보는 일은 멀어졌다.

남 좋은 일만 시켰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느낌 보단 뭔가 강매당한 느낌이다. 강매 당한 듯 찝찝함과 허전함만 남는다. Tv는 내게서 찝찝함과 허전함을 놓고 무엇을 가져갔을까?

심해의 나

심심함과 지루함은 요즘 사회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다. 티비는 대부분 내가 심심해질 시간을 주지 않는다.

가끔 티비를 못 보는 상황들이 생긴다. 참 고요하다. 아니 적막하다. 너무 조용해서 이상한 소리들이 들리는 듯하다. 그 때가 되면 심심함과 지루함의 바다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바다에 빠져든다. 재미라는 공기를 마시기 위해 허우적거린다. 심심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부력이 심하다. 수비적인 성격이라 행동을 하기에 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이 수비적인 성격은 내가 행동을 하지 않을 많은 이유를 술술 풀어낸다. 참으로 달변가다.

그러다 지치면 바다에 갈아 앉는다. 심심과 지루의 바다로 빠져든다. 잠수를 한다. 부력으로 잠수하기도 쉬지 않다. 부력과 갑갑함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 위로 떠오르면 재미라는 공기가 폐로 들어온다. 또 잠수하긴 어려워진다.

떠오르고 잠수 하기를 반복하면 폐활량이 늘어나고 심해 바닥을 만나게 된다. 이제 부력을 참으며 나와 대화를 한다. 그래 뭘 하면 될까? 넌 뭘 좋아해? 이런 내용을 묻는다. 때마침 숨이 찬다. 다시 수면으로 떠오른다. '내 안에 난 뭘 좋아한다고 한 걸까?' 답은 듣지 못했다.

우연히 티비를 끊었다.

결혼을 하면서 티비는 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티비를 안살 생각을 하니, 내가 과연 티비 없이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게 보자는 마음을 먹고 티비를 샀다.

역시나 티비 보는 것을 줄이기는 힘들었다. 재미로 봤던 티비를 끄긴 힘들었다. 적막해서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던 티비를 끄기도 힘들었다.

결혼 직후 아이가 생겼다. 아이가 생겼다고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아이가 티비를 인지하기 전에 티비 보는 걸 줄이고 싶었지만,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첫아이가 태어나고 키우다 보니 시간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바쁘고 정신없었다. 그런 날들이 하루하루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티비로 재미를 찾지 않았다. 적막함을 티비를 채우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티비랑 멀어졌다. 육아로 시간이 점점 없어졌다. 내 얼마 없는 자유 시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아니, 나와 내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 난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난 내일을 앞으로 계속할 수는 있을까? 어떤 새로운 일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날들이 많아졌다. 질문을 던지다 보니, '나' 라는 심해로 깊게 잠수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 안에 있는 나와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고래가 되기.

책을 더 읽으려 노력했다. 새벽 수영에 도전했다. 여러 가지의 작은 것들에 도전을 하기 시작했다. 최근 가장 보람된 일은 10주간 습관 들이기를 완료한 것이다. 10주간 습관 들이기에 많은 목표 중에 일부만 해냈다. 많은 것을 못 이루웠다가 아니라, '어? 되네.' 이런 마음이 든 일이다.

고래가 되어야겠다. 포유류인 난 물고기는 될 수 없으니, 숨 한번 깊게 마시고 저 깊은 바다를 헤엄 칠 수 있는 수영 실력과 폐활량을 갖추길 바란다.

티비를 보는 건 그렇게 문제가 되는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만나게 하는 일을 방해한다면, 분명 나쁜 일이다. 내가 되는 길을 걷고 싶다면, 심심함과 지루함을 견디고 심해의 나를 만나 이야기하는 일을 많이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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